구로사와 아키라 9 - 우리 청춘 후회없다//추문//생존의 기록

나는 이제까지 그를 30번 만날 수 있었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1910년에 태어나 1998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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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사와 아키라의 선배들이 모두 당대의 현실에 무관심했다고 도매금으로 넘길 수 없다면

그들과는 달리 좌파 감독으로서 흔히 칭해지는 구로사와 아키라는 작품 속에서 어떤 시선을 유지했던가

 

"밑바닥"과 "도데스카덴"을 비롯한 일련의 빈민극 리얼리즘들과 더불어

그의 작품 속에서 언제나 최후에 웃는 승자로 배치된 농부, 떠돌이, 짐꾼, 부랑자들에게

휴머니즘 외에 굳이 다른 해석들이 가능할 정도로 그가 단결이라는 표식을 들어올린 적은 없다.

 

모름지기, 좌파는 바라보기의 애잔함으로부터 묻어나는 인간성의 자유주의가 아니라

현실을 뚫고 나오려는 대동투쟁의 깃발로서 구별되어야하는 법이니

구로사와 아키라는 결코 좌파가 아님은 확연하고 단지 그는 일본 민족주의자일뿐이다.

즉, 일본이라는 국가 안에서 모든 일본인을 보듬고자하는 열망만이

그의 다양한 장르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유일한 고리임은 수차례 전술한 바와 같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작품군 중 일종의 사회드라마 층으로 분류될 수 있는 영화들

"가장 아름답게(1944)" , "우리 청춘 후회없다(1946)", "추문(1950)" , 

"생존의 기록(1955)", "나쁜 놈일수록 잘 잔다(1960)" 정도로 추스릴 수 있다.

여기서 사회드라마라는 정의는 작품 내 테마가 당대의 현실에 민감하게 반영한다는 측면을 지시하는 것이다.

 

이미 전술한 바와 있는 "가장 아름답게", "나쁜 놈일수록 잘 잔다"는

각기 전쟁 치하 구로사와 아키라의 국정 홍보론과 공무원과 기업의 부패론을 기화로 삼아 극을 올렸고,

아래에서 살펴볼 세 편의 영화들 역시 각기 정치, 언론, 전쟁 상흔을 다루고 있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사회드라마 속에서 주인공들은 거부할 수 없는 역경에 대해서

마치 새마을 운동을 하듯 버티고 서서 거의 복수의 집념마저 느껴질 정도로 직선적인 대응을 보인다.

"가장 아름답게"의 공장 노동자와 "우리 청춘 후회없다"의 농사꾼 여성들은

기계적으로 남성-국가 이데올로기에 서로 상반된 정치적 입장을 피력하면서도 거의 학대받는 심경이 노출되는데.

여기에서 구로사와 아키라가 여성을 바라보는 일종의 위선적인 시선이 감지된다.

그녀들은 지극히 자발적이라는 가장을 쓰고 있지만, 꼭두각시 인형의 조종 마취 주사에 맞은 듯 달려간다.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 중 거의 유일하게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두 작품에서

전쟁 전과 후, 일본과 미국이라는 검열의 차이가 확연히 느껴지는 모순적인 정치 좌표는

어느새 그녀들의 땀과 노동 안에서 감동의 반전 드라마로 쉽게 가려지고 만다.

 

 

"추문"은 언론 매체의 패악에 대한 고발이라는 측면에서 감독의 전작에서 도두라지는데,

작품 내의 주인공들이 서양화가, 성악가라는 예술가 직군이라는 점에서도 유일하다.

"라쇼몽" 다음 작품이라는 면에서 감독의 법정 영화라는 장르성을 공유하지만,

전작 "라쇼몽"이 법정 영화 형식의 인식론이었다면, "추문"은 정직한 법정 드라마임을 표방한다.

 

 

정확히 10년 뒤에 만들어진 "나쁜 놈일수록 잘 잔다" 역시 일종의 기업 고발 드라마이며

교정되어야할 사실에 대한 복수라는 측면에서 동질감을 유지하지만,

엔딩 처리의 희/비극이라는 다른 결말 처리에서 

10년이란 시간과 언론-기업이라는 대상에서 오는  감독의 현실에의 절망을 읽을 수 있다.

실제로 구로사와 아키라는 더 이상 현대 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사회 드라마를 이후 만들지 않았다.     

 

 

하지만, "추문"은 후작인 "나쁜 놈일수록 잘 잔다"와는 질적으로 다른 함량을 지니는데,

후작이 전적으로 공무원-기업 비리에 대한 복수극에 매진하다가 사랑의 비극으로 종결된다면

"추문"은 단지 언론의 스캔들 조작에 매진하기보다 프랭크 카프라식의 공적 무대 드라마를 빌어와서

이전까지 초라했던 한 개인의 각성에 초점을 맞추고 불필요한 애정 행각을 과감히 절제한다.

 

 

구로사와 아키라와 같이 조감독 수업을 쌓은 영화적 동기이자 "꿈"등을 공동 연출한

혼다 이시로 감독은 "고지라" 시리즈를 꾸준히 연출하여 일본 괴수영화의 기원을 만들어냈는데,

그의 첫 "고지라(1954)" 영화를 비롯 다수에 시무라 다케시가 출현한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전후 일본 영화감독이라면 누구나 원폭에 대한 언급과 집단 외상과 은폐된 무의식을 다룰 수 밖에 없는데,

혼다 이시로는 괴수 고지라를 통해서 일본 국민들의 모순된 양가적인 원폭 의식을 이미지화했다.

이마무라 쇼헤이의 "간장 선생"은 "생존의 기록", "고지라" 등과 맥락을 같이 하는 후배의 경의이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생존의 기록(1955)"은 "고지라"가 대흥행한 다음 해에 만들어졌는데,

괴수가 아닌 현실 속의 불안과 공포를 늙은 철공소 공장 사장의 해외 도피를

법정이라는 국가적인 의무와 연관시켜 풀어놓음으로서 정확히 10년전의 그 때를 직면하게한다.

 

 

위 3편의 영화만 놓고 본다면 구로사와 아키라는 작금의 임상수를 살짝 떠올리게 하는 측면이 있을 정도로

당대의 일본 거장들의 일반적인 작품론과는 달리 사회 현실적인 사안에 대해 영화를 통한 발언을 충실히 했다.

리얼리즘적인 카메라 시선에 있어서도 익히 알고있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선배 거장들과는 차별성이 있으며

이후로 오시마 나기사, 이마무라 쇼헤이 등에 있어서의 정치-사회적인 의식의 최전선으로 일본 영화가 혁신하는 데

나름 중견으로서 일조를 했다고 할 만큼 "나쁜 놈일수록 잘 잔다(1960)"까지 자신의 솔직한 의견을 밝혔다.

 

 

반대로 읽자면 60년대 이후 일본 혹은 세계적 격동기에 구로사와 아키라는 자신의 정치-사회적인 발언을 삼가했고,

사무라이 활극과 서민극, 대하 역사극 등의 일련의 휴머니즘 선언과 허무주의 작품 안으로 자신을 안치시켰다.

1960년대 태양족 영화, 1970년대 이후 일본 협객전 류의 야쿠자 영화, 70년대 로망 포르노 등의 장르물과 

오시마 나기사의 "일본의 밤과 안개(1960)", 이마무라 쇼헤이의 "돼지와 군함(1961)" 등의 영화들이

일본 내의 현실을 구로사와 아키라의 점잖은 어법과는 다른 과감하고 직설적인 연출로 내리꽂기 시작할 쯤

구로사와 아키라는 더 이상 사회드라마라는 장르안으로 자신을 삽입시키지 않았다.

"천국과 지옥(1963)"이 관념적 계급 형사물로, "도데스카덴(1970)"이 산만한 칼라 빈민 버라이어티로만

규정지어질 수 있다면 아마도 당시 후배들과 자신 사이의 간극을 체감한 감독 자신의 심경이 담겨있기 때문일 것이다.

   

21. 우리 청춘 후회없다 わが靑春に悔なし(1946) : 반성문에서 가짜 땀냄새가 난다.

 

본시 후일담이란 드라마일 수 밖에 없다.

거기엔 '그 시절 아름다웠노라'는 회한의 허튼 메아리와 

'지금 여기서 다시'라는 실천의 음성이 담긴 질책으로 메워지기 마련이지만,

모든 후일담들이 그렇듯 그것들은 쓰여지지 않았음이 더 좋을 운명에 놓여져있기 마련이다.

 

 

구로사와 아키라에게 이 작품은 마치 하나의 숙제와도 같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전쟁 전 전술한 바 있는 "가장 아름답게(1944)"를 통해 전쟁 승리의 동력을 인격완성으로 치환시키는

돌이킬 수 없는 파시즘 찬양가를 서슴없이 부른 바 있으니

적어도 젊은 시절 한 때 좌익 계열에 몸담은 인연으로 낯이 잠깐이나마 뜨거웠다면

굳이 누가 추동질 하지 않아도 스스로 반성문 정도는 써 내려갈 정도의 체면상의 윤리는 가졌을 것이다.

 

 

"우리 청춘 후회없다"는 전쟁 전 선배 감독들이 일본의 전쟁 책임론에 대해서 각성하지 않았던 시기에

마치 미군정의 사주라도 받은 듯 혹은 당시 전쟁 반대를 외치던 운동가들의 외침을 기념하듯

같은 양식의 다른 내용의 찬양가로서 스스로가 만든 "가장 아름답게"에 대한 부정의 찬가이다.

두 영화 모두 극 중에서 합창곡이 스크린 내외로 퍼져나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필연이라면 더 논할 수 있는데, 전작의 여성 공장 노동자는 이제 여성 농꾼이 되어 논을 일군다.

전작에서 여성들은 감히 남성을 꿈꾸지 않았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사랑이 있음에도 임신의 후계는 허용되지 않는다.

기실 구로사와 아키라는 여성에게 출산의 임무보다는 당대 남성들에 대한 희생양의 변론자로 서기를 원하며

이러한 성적 역할론은 가련한 신파조의 드라마로서 관객에게 보다 친숙하고 편안히 다가서고 거부하지 못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은 결코 진실을 알지 못하거고 집중하기만 하는 무지몽매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전작에서 여성 노동자는 초지일관 국가의 충복이었고 이데올로기적 사실 관계예 대해 무관심했다면

이번 작품에서 하라 세쯔코가 맡은 여주인공은 동거인이자 반전운동가인 남자의 업무를 대강 추측할 뿐이다.

즉, 그녀들은 감히 정치적 이데올로기 안으로 다가설 수 없다는 감독의 장치는 황망할 따름인데,

이 점을 드라마 내적으로 과감히 메우는 기술은 다름 아닌 노동의 숭고함이니 더욱 난감하다.

 

 

가령, 하라 세쯔코가 맡은 여주인공이 이미 죽은 애인의 고향에서 시어머님이라할 노인과 더불어

죽을 힘을 다하여 논농사에 매진할 때 그녀의 선택은 남편의 유지를 따른다는 농촌 운동가의 역할이라고

구로사와 아키라가 친절히도 극 종결에 대사로 지시함에도 불구하고 내내 위태롭게 모순적이다.

 

 

그녀가 구로사와 아키라 자신의 반성문의 주체라고 볼 때

전쟁이 끝난 후 드디어 마을 사람들의 따뜻한 시선을 받게되는 마지막 장면의 트럭 속 풍경은 어색하다.

정작 단죄되어야할 인간들(극중 검사역 친구)에게조차 증오의 시선을  던지지 않고

도시의 누구하나에게도 패망의 책임을 정확히 부가하기를 거부하며 시골에만 쳐박힌

구로사와 아키라의 카메라는 편협한 그의 국가론이 여전히 유지됨을 증명한다.

 

 

조금 더 나아간다면 1933년부터 시작되는 대학교 내 학생운동의 출발에서

반 파시즘과 자본-군벌-대학의 밀착을 고발하지만

이미 식민지화되어버린 조선을 비롯한 동남아, 중국과의 전쟁 부분은 전혀 입에 담지 않을 때

구로사와 아키라가 가진 가련한 후일담은 결코 역사적 통찰을 담지 못하고 있다.

 

 

엘리아 카잔의 "워터 프론토"와 레니 리펜슈탈의 "의지의 승리" 등과

단적으로 비견하여 쉽사리 동류에 올려놓을 수만은 없지만,

흔히 말하는 형식과 내용의 분리불가능성과 일치의 미학성이라는 척도를 놓고 본다면

위 두 감독이 세간의 평가에서 손가락질을 받는 상식과 바교한다면

구로사와 아키라는 지나칠 정도로 과거는 묻지마세요 유행가에 묻혀버렸다.

 

 

역으로 말하면 이는 그만큼 일본 문화계 내에서의 역사 반성의식이 얇다는 의미도 되는 것이다.

단순한 양의 문제는 아니겟지만, 이후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에서 더 이상의 자기 반성을 찾을 수 없고

그나마 유일하고 재빨리(?) 내놓은 시말서조차 빈약하고 왜곡의 전략이 의심스러울 때  

구로사와 아키라의 30대 중반 시기에 대한 회의가 밀려든다.

 

 

"우리 청춘 후회없다"는 단 2년 동안 변환된 감독 자신의 여지없는 반성문이지만,

여전히 남성 국가론의 담보 안에서 착취되는 여성 노동이라는 자기 모순의 홍보론이다. 

 

 

22. 추문 醜聞(1950) : 낮에 별이 뜨려면 피가 필요한 법이군.

 

서양식으로 일본의 산을 그리는 남자와 서양 성악을 부르는 여자가 산에서 만난다.

그 주변에는 글자를 알 것 같지 않은 부랑자 주민 셋이 보인다.

( 그들은 후일 재판정에서 일종의 "숨은 요새의 세 악인" 처럼 보인다. )

화가는 붉지 않은 산을 붉다고 그리며 보이지 않지만 산은 움직인다라고 말한다.

도입부는 정확히 우공이산의 느린 길을 영화 내에 심을 것임을 간명하게 적시하고,

화가가 탄 오토바이는 길게 뻗은 직선의 도로를 내달린다.

 

 

"추문"은 우연히 만나게된 두 남녀를 3류 언론이 스캔들화하고 이를 바로 잡으려는 법정 소송에 관한 장르물이지만,

극 내부에서 실제 법정이 등장하는 부분은 후반부의 십여분 정도에 불과하다.

영화는 으례 관객이 기대하는 로맨스물의 공식처럼 두 남녀가 실제 재판 참여 과정에서

실제로 사랑에 빠지는 것과 같은 뻔한 달콤함의 공식으로 번지는 대신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인물을 중앙에 배치하여 다시 한번 구로사와 아키라의 주 관심사인 각성에 주목한다.

 

 

타락하고 무능한 변호사 역할의 시무라 다케시가 연신 술과 도박에 빠져있는 상황에서

감독이 한송이 연꽃과 같은 희생양으로 처분하는 것은 결핵이라는 가난병에 걸린 별이라 칭해지는 딸이다.

결국 딸의 죽음 이후에야 여전히 덜덜 떨리는 두손으로 양심선언을 하게되는 과정이야말로

구로사와 아키라가 낡은 목소리로 반복하는 '새로운 탄생'의 공식 법정 선언문이다.  

 

이 과정에서 크리스마스 송가와 올드 랭 사인 등의 노래가 개인과 집단의 목소리로 불려지고

"주정뱅이 결투"에서 일본 현실의 모티브로 활용된 오염된 우물 또한 별빛으로 조명처리되어 다시 활용된다.

약간은 싱겁기까지 한 인물들의 평면성은 미후네 토시로와 시무라 다케시의 관습적인 연기,

깊지 못한 시나리오의 흥취 등으로 인해 영화는 사회드라마도 휴머니즘도 제대로 건져올리지 못한다.

두 남자 주인공이 찾아간 술집에서 올드 랭 사인이 울려퍼질 때 왜 모든 손님들이 한 장면씩 배치되어

각자의 사연이라도 담긴 듯 노래해야하는지 말하지 않고 일종의 분위기 전달에만 젖어버린다.

 

 

기존의 구로사와 아키라의 어느 작품보다 멜로드라마적인 구성에 집착하듯 매달리는 영화는

갑작스럽게 선언되는 딸의 죽음이나 반대편 변호사의 지극히 굳은 목소리,

희화화되버리는 세 명의 산 사람, 아무도 사지 않는 그림과 열리지 않는 독창회처럼

극 종결에는 산뜻한 승소를 거둘지라도 실상은 아무런 과실도 따지 못한다.

화가와 성악가는 기존의 의사 역할과 같은 사회적-인간적 치유자 역할인지도 모호해진다.

 

 

곁다리지만, 주인공 화가인 미후네 토시로가 타고다니는 오토바이에 대해 덧붙이자면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에서 "말"이 주는 이미지는 항시 불길한 예감과 처절한 좌절 사이를 오가는데 반해서

초창기 현대적 말인 오토바이는 크리스마스 트리를 싣고 가는 산타클로스의 썰매와 같이

한 가족을 구원하고 타인에의 도움과 자기 개성을 드러내는 모던한 장치로 기용된다. 

 

 

"추문"은 직설적인 사회 고발이라는 장르 안으로 한발 드러놓다가

각성의 멜로드라마라는 허방다리로 오히려 물러서버린 피를 간직해야하는 별 이야기이다.

   

 

23. 생존의 기록 生き物の記錄(1955) : 불뿜는 공장은 노인과 같이 정신병원으로 침몰한다.

 

정확히 10년이 지났다. 1945년 8월 "리틀보이"가 히로시마에 떨어졌다.

원폭 투하에 대한 어떠한 과학적 정치적 음모론의 사실 여부를 떠나

20세기의 강고한 이성이라는 제 일一자는 군국주의와 자본주의의 훌륭한 결탁 아래서

마지막 가뿐 숨을 8만명의 희생자와 더불어 제대로 내쉬지도 못하고 사라졌다.

 

남겨진 땅의 모든 인간들에게 미래는 더 이상 황금 가지에 열린 열매가 아니었고,

신적 위치에서 내려왔지만 여전히 받들어지는 천황 아래 당대의 일본 국민들은

새로운 집단 무의식으로서 원자 폭탄이라는 신화를 그들의 꿈자리 속으로 착종했다.

 

전쟁 전 세대 감독으로서 구로사와 아키라는 원폭에 대한 피해 망상에 시달리는

한 남성 노인의 급격한 추락을 스크린 위에 올림으로서 "고지라"의 은유된 공포를

가족 내 갈등과 일본 도시인들의 무감각하고 이기적인 삶으로 직접적으로 고백한다. 

 

미후네 토시로의 70대 노인 연기와 분장이 인상적인 데 반해

시무라 다케시가 다소 싱거운 관찰자 배역의 치과 의사로 분한 이 작품에서

썩어들어가 치료를 받기 전까지 특별한 불편이 없다면 그대로 생활하는 치아가 아픈 일본인을

치료해야하는 시무라 다케시가 결국 원폭 투하에 가장 민감한 주인공에게 한정 치산의 선고를 내리게된다.  

 

단순한 원폭에 대한 두려움의 은폐 고발이라는 주제를 뛰어넘는 감독의 장치들은 자못 의미심장한데,

우선 주인공 노인은 철공소 사장으로 철이 상징하는 금속의 힘을 다루거니와

세 명 이상의 첩을 거느려 자녀가 7명 이상이 되는 전근대적인 가족 구성원을 지닌다.

 

주인공의 두려움이 단순히 원폭에서라면 제작년도별로 보건데

다른 출연 구성원들은 왜 공포를 가지지 못하는가를 묻는 대신에

감독이 그들에게 거의 일괄적으로 부여하는 재산 다툼과 각각의 현실적 성격 부여 등은

일단의 젊은 세대들에 대한 불신이 담긴 감독 자신의 또다른 세대 단절이 담겨져있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브라질로 가서 농장을 열자는 새로운 제안에 대해

단지 가기싫다는 이유를 뒷받침할만한 자식들의 구체적 일상이 제시되지 않을 때

마치 감독은 후세대들의 답답하고 척박한 안전 의식과 불감증을 지적하는 듯 하다.

브라질에서 다시 일본으로 들어와 농장을 하려는 일본인을 긍정적으로 그리거나

첩의 아들딸들을 거의 무직자로 묘사하는 장면 또한 같은 바탕에 서 있다.

더불어 결국 주인공 노인을 한정치산자로 판정할 수 밖에 없는 곤혹을 토로하는

법원이라는 국가 기구 또한 구로사와 아키라에게는 무능한 정권으로 약하게 고발된다.

 

여전히 비와 더위라는 구로사와 아키라가 안개와 더불어 편애하는 두 개의 기후 장치는

이 작품에서도 내내 주인공을 비롯한 인물 전부를 풀리지 않는 오해의 가족적 미궁 속으로 던지는 데 일조한다. 

하지만, 영화 속 끈쩍끈쩍한 습기와 연신 흔들리는 부채질 너머로

주인공 미후네 토시로가 법정 밖에서 가족들에게 음료수 병을 나누어주는 따뜻한 가부장제를 되살릴 때

감독은 되려 전쟁 패망 이후에 국가 경제를 일으킨 구세대에 대한 신뢰와 더불어

원폭 투하로 인한 패망의 기억을 단순한 과학적 통계(수소 폭탄의 객수)로 덮으려는

후세대들의 민망한 역사 인식에 일침을 가함으로서 자신의 진정한 의도를 드러낸다.

 

어쩌면 극 내에서 단 한번도 2차 제국주의 패전을 언급하지않고

수소폭탄의 가공할 위력만을 신문 등으로  보여줄 때

실상 감독은 도피가 아닌 위험에의 각성을 도모하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다음 부터이다.

주인공 노인이 결국 정신병원으로 가게 되는 이유는 스스로의 공장 방화때문이지만,

전쟁 이후 일구어낸 자본의 축적을 말살한 이후에야 가족들이 각성할 것이라는 믿음은

뜻하지않게 가족 이외의 공장 노동자들의 일성에서 산산히 부서진다.

갑자기 찾아든 타인이라는 존재에서 자신의 상상화된 도피처는 길을 잃는다.

 

다시 말하자면, 처음부터 각성이나 도피에는 모호함이 뒤따랐다.

일본 내부로부터의 구세대의 평화주의 선언인지,

수소폭탄을 넘어서는 국력배양으로서의 후세대 훈계인지 분명히 밝히지 않은 채로

그저 두렵고 불안하다는 노인의 말은 비행기 폭음을 착각하는 스스로의 망상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럼으로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 내에서 의사라는 배역의 전인적인 치유성의 특성을 부여받지 못한

시무라 다케시를 비롯한 정신과 의사들의 구세대들의 절망은 스스로 진단받지 못한 데서 연유가 깊다.

하지만, 마지막 저 장면사진에서와 같이 구세대를 연기하는 미후네 토시로와 시무라 다케시만이 떠오르는 태양을 직시하며

원폭의 웅장함을 맞이할 특권을 지닌다.

 

 

"산 자의 기록"은 원폭 투하에 대한 집단 피해 망상이 아닌 10년 후 잊혀진 패망에의 기억을

다시 소환하여 후세대들에게 불투명한 훈계를 내리려는 은폐된 구세대 신뢰보고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