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까지 그를 10번 만날 수 있었다.
장률은 1962년생이다.
2016년 143번째 영화
10. 춘몽 A Quiet
Dream, 春夢 (2016) : 죽을 영화, 살아있는 죽음을 동행하다.
영화 밖의 풍경들이 자꾸만 영화 안으로 들어섰다. 영화가 스크린 위에 있을 때도 불이 켜진 이후에도.
5명 뿐인 9시 40분 상영 시간의 관객 중 홀로 앉은 노인 한 분은 상영 내내 객담을 바닥에 뱉어냈다.
종영된 이후 song님은 노인의 행동에 불평을 쏟아냈고, 알바생은 밀대걸레를 들고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검표원에게 노인이 영화표를 구입한 관객인지 묻자, 검표원은 그렇다고 말하며 불편을 드려 죄송하다고 했다.
노인의 행위는 마치 영화 속 영상 자료원에서 장률의 데뷔작 <당시 唐詩>를 볼 때의 양익준, 윤종빈의 태도와 같았다.
종로 3가 신호등을 건너니 한벌에 5천원 하는 등산복 땡처리 점포를 비롯 화장품, 외국과자 판매점들이 늘어서 있었다.
점점 더 서울 극장으로 향하는 길가의 상권은 붕괴되고 있었고, 종각 피아노거리 중심가에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월세가 너무 높고 장사도 되지 않으니 세입자들이 건물주들에게 월세를 낮춰달라는 호소의 글귀가 적혀 있었는데,
아닌게아니라 종각 쪽 점포들 중 몇몇은 폐업했거나 다른 업종으로 전환 중이었다. 오래된 상권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식사 도중 손전화를 분실한 것을 알았고, 극장에 돌아가니 관람석 그 자리에 그대로 2G폰은 가만히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있었다'의 각운에는 과거라는 유령이 들어서있다. 본편과는 달리 이 각운을 해원해줄만한 그 무엇이 지금 여기에는 없다.
이같은 영화외적인 풍경과 올해 부산영화제에 대한 영화인의 보이콧을 겹쳐본다면 본편의 엔딩은 모순적으로 다가온다.
영화관 속 노인이 어느새 영화 속 양익준이 되고, 영화관 밖 종로 상점들의 피폐함이 영화 속 수색역 변두리로 채색되었다.
버려두어도 아무도 가져가지 않는 11년차 손전화 2G폰이 '좋아요'라는 공감의 자본화 시대를 거부하는 이 블로그와 동급이듯
본편의 엔딩이 과연 영화인들의 보이콧을 지지해야할 올해 부산영화제에 시의적절한지 혹은 무감한지 반문하고싶어졌다.
오해를 피하자면, 본편에 대한 40자 단평 '죽을 영화, 살아있는 죽음을 동행하다.'에서 '
을'은 '과'의 잘못된 표기가 아니다.
이 블로그의 모든 잡문이 일필휘지 퇴고를 거치지 않아 문맥이 엉망이고 오타 투성이인 것은 전혀 부끄럽지 않고 자책도
들 지 않지만, 가끔 이렇게 단순히 한 문장의 조사 하나를 선택함에서도 갈등이 키보드 위를 점유하는 상황이 있다.
본편에서 한예리와 그의 남자들을 '과'로 표현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하나이면서 동시에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과'라는
함께보다는 '을'을 선택하고 싶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동행'이라는 명사를 덧붙여 경계를 빗겨나가고자 했다.
극장을 나서며 문득 2010년 부산영화제에서 <두만강>을 관람하고 남포동 길을 걸으며 song님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점점 더 도식적이 되어간다' 나 역시 <두만강>이 모던 시네마의 작법 중 안토니오니의 그것과 유사했다고 응답했었다.
확실히 장률은 <풍경>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데, 그것이 그의 국내 정착과 관련되는지는 작가 개인의 컨텍스트적 맥락이다.
그럼에도 본편에서 거의 동어반복으로서의 자기복제가 불쑥불쑥 드러날 때마다 문득 전술한 <두만강>을 떠올리게된다.
이는 <풍경> 을 포함한 세 작품의 잔상과 골조가 본편 안에서 마치 식당의 남은 반찬처럼 재사용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본편이 개봉되기 전 캐스팅된 배우만으로도 대개의 독자들은 영화의 본질을 추스릴 수 있는데, 알려진 바와 같이
세 명의 영화감독들이 주요 출연진으로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등장할 때 즉각적으로 전작 <필름 시대의 사랑>을
이어서 영화에 대한 영화로서 좌표를 지정하게된다. 여기서 방점은 감독들이 그들의 데뷔작에서 주 조연으로 등장함으로서
감독이자 배우라는 지점을 본편 안으로 전이했음에 찍히는 것이 아니라 그들 3인이 모두 결말에서 죽었다는 것에 놓여야한다.
이같은 얼개는 곧 <경주>의 혼령으로서 시간 여행을 다녔던 최현(박해일 역)과 이어지면서 본편을 유령들의 공간으로 지정한다.
본편을 지배하는 두 개의 열쇠말이 죽음과 영화임은 부인할 수 없다. 문제는 그것이 왜 어떻게 본편 안에서 결합되는가에 있다.
여기에는 다소 기이한 수미상관과 캐릭터의 해원 구조가 연관된는데, 오프닝에서 제일 먼저 등장한 인물인 박정범의 모습은
거리 반사경에 신체 중간이 불투명하게 잘린 느낌으로 제시되고 엔딩에서 양익준, 윤종빈만 보이고 박정범은 부재한다.
두 사람이 지나간 뒤에 엔딩 장면은 고압 전류 주의 경고판에 주목하는데, 이는 후반부 한예리가 올라갔던 전봇대를
비롯하여
세 사람 모두가 올라갔던 고압 전선을 섬뜩하게 연상시킴으로서 굳이 이들이 이미 혼백임을 인증시킨다.
이는 30여분이 지난 이후 오프닝 타이틀이 서서히 기록되고 한예리의 춤을 따라 카메라가 360도 원형 회전을 한 이후
그 자리에서 술을 마시던 세 명의 남자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것에서도 이미 예시되어 있거니와 그들 각자의 캐릭터로서
1인 양아치, 간질환자, 탈북민 노동자라는 패배자적 정체성에서도 반복 인증된다. 게다가, 장난감 권총을 든 남성이나
박정범의 가방 속 칼, 악덕사장 김의성이 양익준, 한예리가 아닌 윤종빈의 간질 발작 연기에 체불 임금을 지급하며
한예리의 아버지가 식물 인간 상태인 점은 본편의 공기가 모두 죽음을 향해 흐르고 있음을 여실히 노출시키고 있다.
이미 전작에서 죽은 이들은 '고향 주막' 안에서 중국에서 온 여인 한예리를 모두 사이좋게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같으면서 동일한 정체성의 3인이 좋아하는 한예리가
아버지를 찾아온 이주인으로 장률 자신을 페르소나화한 것이라면
왜 그들은 <경주>의 최현 교수처럼 유령이 되어 수색역 부근을 떠돌아야하는가로 질문은 옮겨진다. 수색역을 포착하는
카메라는 온통 '슈퍼'라는 간판의 구멍가게와 주택가 비탈길, 재건축 예정건물 등을 통해 저개발의 기억을 드러내고
이에 반해 디지털 미디어 시티 등 상암 지구의 높은 빌딩은 전혀 다른 서울의 밀집도를 선명히 드러냄으로서 이분화된다.
재개발 예정인 주택 앞마당에 비닐로 대충 건축한 '고향 주막'은 말할 것 없이 영화들의 해방구이다. 주막 손님 중 여자가
'바보 3명은 어디 갔나?"로 물을 때 한예리가 그들에게 돈을 안 받을테니 나가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일종의 자존감으로
우리의 영토를 저열한 호명으로부터 지켜야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면 결말부에서 한예리가 우연히 사진 찍은
오토바이 탄 남자인 유연석이 등장하여 한예리와 함께 춤을 추고 나간 이후 한예리가 쫓아나가는 행동에는 또다른
(상업) 영화에의 길(유연석은 맥주값을 슬쩍 지불한다.)을 찾아나서려는 회생에의 욕망이 동반되어 있다.
유연석은 3인의 루저들과는 다른 외모를 장착한 채로 한예리를 '영화/춤'으로 이끌어내는데, 기이하게도 접합되는 것은
한예리의 예정된 장례식이다. 이는 <경주>의 오프닝에서 자신의 선배이자 그 자신이라고 할 장례식의 최현 교수와는 달리
단순히 유령으로서 죽음의 도시를 추억 여행 속으로 소멸되는 것과 또다른 간극을 보인다. 한예리가 그의 남자 3인과
영상자료원에서 '꽁짜'로 보는 영화는 장률 감독의 데뷔작 <당시 唐詩>로 추정되는데, 이를 통해서도 한예리=장률임은
입증된다. 되새길 필요도 없겠지만, 감독은 그와 더불어 독립 영화로 자신의 길을 열었던 후인들에게 지지를 보내고자한다.
오직 엔딩에서의 흑백- 칼라의 전환에만 주목하여
일방적인 한예리의 살신성인을 추정하는 것은 과도하지만. 그렇다고
남자 3인 모두에게 한예리/영화가 배당하는 서사의 질과 양이 동일한 것도 아니다. 실질적으로 본편에서 해원의 서사를
만끽하는 것은 오직 박정범 뿐이다. 그는 체불 임금을 받게 됨으로서 살인을 범하지 않게되고, 헤어졌던 탈북민 애인과도
만날 수 있다. ( 신민아와 김태훈이 등장하는 환타지 장면은 확실히 <경주>의 반경을 상상하게 유도한다. ) 그에 비해서
양익준은 자신만의 시퀀스로서 시장 바닥, 당구장, 한예리 아버지의 목욕, 요양 병원 앞에서의 쑥 뜯기 등이 있음에도
정체성을 전환시키는 정도의 쾌감까지 확장되지는 않는다. 물론, 가장 비좁은 분량은 윤종빈에게 해당된다.
양익준에게는 소주를, 박정범에게는 맥주를 배정한 것에 비해 윤종빈에게는 종이각 우유를 손에 들리게 하고,
그는 한예리가 거주하는 집의 건물주로서 다른 배역들과는 달리 다소 부유함에도 간질 발작 외에는 특별한 개별 서사가 없다.
윤종빈은 오직 성적 충동만을 보이고 노래방에서 한예리가 가슴을 만져도 된다고 하지만 실제로 다가서지 못한다.
망상이지만, 박정범과 양익준과는 달리 윤종빈이 상업 영화판에서 흥행성에 주목하게된 위치에 서게 된 차이가 이같은
구별에 작용했을 수도 있겠다. 흥미롭게도 윤종빈의 간질이 박정범의 체불 임금을 받아냈다는 점은 되새길만하다.
어쨌든간에 영화가 박정범을 가장 배려하면서도 동시에
신민아의 포옹을 통해 두 사람 역시 위로함은 간과될 수 없다.
하지만, 한예리=장률=영화는 간암으로 추정되는 병으로 급사한다. 영화 전체를 휘감는 죽음의 공기는 결국 흑백영화에서
칼라로 이동함으로서 기적을 이룬다. 그것을 과연 영화의 재생 혹은 부활이라 단정하는 것은 전술했듯 다소 도식적이다.
특히 한예리의 아버지가 휠체어에서 일어서서 카메라화 되어서 질주하는 듯한 운동 에너지를 보일 때는 여설히 <풍경>의
엔딩이 떠올랐다. 아버지의 휠체어가 자체적으로 움직이는 화면 역시 <풍경> 이후로 이어지는 영화적 개입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본편은 엔딩을 이같은 카메라의 질주에서 종료시키지 않고 별도의 프롤로그를 덧부임으로서 칼라의 색감을 환영한다.
전술했듯, 양익준은 윤종빈에게 다가가 박정범을 찾으러 가자고 하고 두 사람은 더 이상 한예리를 찾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예리는 왜 죽어야했을까? 그녀의 흑백영화는 아버지의 칼라 영화라는 기적을 소환했다고 해도
여전히 양익준과 윤종빈은 고압전류 철망 근처에서 조우하고, 오토바이 남자 유연석을 따라나선 이후를 말하지 않는다.
물론, 그녀에게 동성애적 애정을 품는 주영(유일하게 영화감독이 아님으로 인해 영화내적 존재에 불과한)은
예리에게
"시"라고 말하고 여기에 영화는 이태백의 한시를 더하고 백두산 천지를 보지 못했다고 덧붙임으로서 봄날의 기도를
어느새 시/영화/꿈을 통해 다다르고자 하지만 아직 가보지 못한 예술에 대한 숭배의 몸짓인 '죽음의 춤'으로 종결짓는다.
한예리의 사망 보험금은 누가 수령했을까? 그것은 아버지의 간호와 더불어 또 어디에 쓰였을까? 혹시 그 돈으로 인해
관객은 심청전 인당수처럼 아버지의 재활을 보게된 것일까? 마지막에 박정범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 모든 질문에 가장 상업적인 대답을 하자면 한예리/장률/영화가 지금 여기의 독립 영화인들에게 흑백의 '고향 주막'이
아닌 색감 그대로의 더 밝은 세상으로 나아가라고 격려하고 있다는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전술했듯이 이 격려가 올해
부산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선정된 것은 한편으로는 당연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엇박자임을 부인하지 못하겠다.
관객으로서 휠체어의 아버지가 한예리에게 "(자식은) 너밖에 없어"라고 말할 때 이를 그저 내내 지지할 수만은 없다.
<춘몽>은 죽은 영화들이 모여 죽을 영화를 사랑하는 동안의 행적을 쫓아가는 꿈같은 봄날의 시간들이며
젊고 매혹적인 영화를 찾아나선 영화가 죽음으로서 언젠가 살아나야할 영화들에게 보내는 격려의 부활극이다.
(연예인)
"나 뉴진스 하니인데 좋아요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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