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여기 게시판이 시끄럽더군요.
표절이냐, 아니냐, 장르소설에 표절이 어딨냐... 뭐 그런 이야기들이요.
문제가 되는 작품의 표절 여부에 상관 없이 몇몇 글은 한 사람의 장르소설 매니아로서 부끄럽기 그지 없었습니다.
표절과 오마주는 너무 차이가 미묘한 것이기는 한데...
저는 영화 <노팅힐>을 보면서 움찔움찔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특히 거의 마지막 기자회견 장면에 이르렀을 때는 영화에 집중하지 못할 정도로요.
그 장면을 보면서 확연하게 떠오르는 영화가 있었거든요.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로마의 휴일>에 거의 같은 장면이 있습니다.
영화의 전체적인 뼈대도 <로마의 휴일>과 매우 흡사하죠.
하여튼, 그 당시 <노팅힐>을 보고 많이 혼란스러웠습니다.
이건 표절인가? 오마주인가? 아니면 패러디인가?
원작자의 허락이나 인정 여부와 상관 없이,
<노팅힐>을 보고 표절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그건 아마 다음과 같은 이유들 때문일텐데,
1. <노팅힐> 자체의 완성도가 매우 뛰어납니다.
2. <로마의 휴일>은 로맨틱 코메디의 클래식이자 명작 취급을 받는 영화입니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고전이라는 거죠.
3. <노팅힐>에는 <로마에 휴일>에 대한 애정과 존경이 묻어 있습니다. 이 부분은 ①번 항목과 연관이 있습니다.
사실, 원작자의 언급이 없는 상황에서 표절과 오마주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2번과 3번 항목에 있다고 판단됩니다.
<노팅힐>은 <로마의 휴일>을 참고해서 이렇게 멋진 작품을 만들었구나.
그러면 '오마주'로 인정 받는 거죠.
하지만 <노팅힐>이 상투적이기만하고 오글거리고 감동도 어거지였다면
'표절' 작품이라고 비난받고 어느새 잊혀졌을 겁니다.
그리고 또 하나, <로마의 휴일>이 클래식이 아니라 <노팅힐>과 비슷한 시기에 나온 작품이었다면
<노팅힐>은 로맨틱 코메디의 또 다른 명작이 아니라, 그저 유행을 따른 인기작 정도로 불렸을 겁니다.
내지는 표절로 치부한 사람도 부지기수였을 거고요.
<스카이림>의 저작권을 가지고 있는 곳이 베데스다인가요?
베데스다의 입장을 알기 전까지 표절이냐, 오마주냐에 대한 판가름은 어쩔 수 없이 독자들의 판단에 따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갑론을박이 나오는 상황이겠죠.
판단은 어디까지나 독자들에게 있습니다.
장르소설을 즐기는 우리들에게요.
그런데 제가 아쉬운 부분은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라는 것에 있지는 않습니다.
한국 장르소설의 한계가 그렇다, 표절 아닌 작품이 어디있느냐...
뭐, 그런 이야기를 보면 힘이 쭉 빠지는 겁니다.
시장은 수요를 따라가는 법인데 독자들의 입장마저 그렇다면
앞으로 장르소설 시장이 가는 방향도 뻔하지 않겠습니까?
다들 알고 있다시피, 한국 장르소설 시장에도 좋은 작품이 많이 있습니다.
<납골당의 어린왕자>라든지, <탑 매니지먼트>라든지, <마이, 마이 라이프>라든지.
뭐, 개인적으로 당장 생각나는 건 그렇네요.
물론 모두가 표절에 대해 관조적인 입장을 가진 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분위기가 확산된다면... 장르소설의 미래가 밝지는 않을 거라는 겁니다.
단편적으로 '내 취미는 장르소설 읽는 거'라고 떳떳하게 말하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 거라는 거죠.
무슨 B급 문화 중에서도 부끄러운 것을 즐기는 것 마냥...
장르소설을 많이 즐기는 일부 사이에서까지 표절에 대한 관조적 분위기는 지양해야 할 일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즐기는 취미의 미래가 암울해질 수 있는 일이니까요.
이렇게 무슨 '주장하는 글' 같은 걸 적는 게 부끄럽기는 합니다만...
이토 도서게에 그런 글들이 보여서 고민하다가 이렇게 길게 적습니다.
저도 어떤 면으로 떳떳하지 못한 입장이지만
나중에 이불킥이든 뭐든 하더라도 끄적이고 싶은 건 끄적여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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