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한 평가 부탁드립니다! 진지하므로 궁서체!
***
루베트 발렌타인.
그녀는 발렌타인 공작가의 장녀입니다.
저와 동년배인 여자애로 기다란 금발과 단아한 얼굴은 마치 공주님을 연상시킵니다.
왜 특임대에 들어왔냐는 질문에 루베트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라는 어려운 말을 썼습니다.
높은 신분에 그에 걸맞은 의무가 따른다고 합니다.
그게 꼭 특임대에 들어올 이유인가 의문이 들더군요.
뭐, 불만은 없습니다만.
그녀는 귀족가의 영애답지 않게 까탈스러운 성격이 아니었으니까요.
루베트는 처음 특임대에 들어왔을 때 신분을 숨겼습니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외모와 절도 있는 행동, 고풍스러운 어조는 귀족 그 자체였습니다.
그녀의 아버지인 딸바보 공작이 특임대에 방문함으로써 그녀의 정체가 확실히 밝혀졌습니다.
공작이 눈을 부릅뜨고 남성대원들을 째려보는데 기분이 참 더러웠습니다.
우리는 루베트를 어려워했지만 그건 시간이 해결해주었습니다.
함께 교육을 받고 훈련을 하면서 말을 편히 놓고 친해지게 됐습니다.
루베트는 타고난 핏줄 덕분인지 검술이면 검술, 마법이면 마법. 그 외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특임대에서 최강의 실력자임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죠.
그녀는 하다못해 팔씨름도 강했습니다.
여자는 물론, 남자들도 모두 나가떨어졌습니다.
남자의 자존심이 있지!
저는 매일마다 루베트에게 도전을 했습니다.
그녀의 보드라운 손을 잡아보고 싶다는 불순한 의도 하에 그랬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저는 그런 쫌생이가 아닙니다.
......
어이, 당신!
나는 열일곱 살이라고.
연심을 품을 수밖에 없는 여자애의 손을 잡아보겠다는데 불만 있어?
흠, 어쨌거나 저는 오늘도 루베트에게 도전을 했습니다.
그녀는 눈치채지 못한 듯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
저는 사력을 다했지만 루베트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작은 손아귀에서 어떻게 이런 힘이 나오는지...
저처럼 있는 힘을 다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흔들리는 안색을 보니 애쓰고 있음이 확실하네요.
아닌척하면서도 지기 싫어하는 성격, 그녀 답지 않은 귀여움이 느껴집니다.
쉽사리 결판이 나지 않자 동료들이 주위에 모여들어 흥미롭게 지켜보기 시작했습니다.
이 승부, 질 수 없습니다. 루베트에게 이겨볼 만한 종목이라고는 팔씨름뿐이었으니까요.
오늘은 왠지 느낌이 좋습니다.
최근, 껄끄러운 동료를 이세계로 날려버린 후 저의 컨디션은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카나가 '앗!' 하고 놀라며 어느 한쪽을 가리켰습니다.
모두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이럴 수가. 또 게이트입니다.
대원들 중 누구 한 명이 일을 하러 떠나야 합니다.
아참. 게이트 발생 시 진입 순서는 성적순입니다.
루베트가 벌떡 일어섭니다.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게이트를 향해 걸어갔습니다.
말려야 합니다. 딸바보 공작이 알면 우리들을 가만 두지 않을 겁니다.
새로운 게이트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속옷만 남겨놓고 그곳으로 던져버릴 위인입니다.
대원들에게 은밀히 압박을 주고 특무대장에게 당부했겠지만 그게 무슨 소용일까 싶네요.
본인의 의지가 저러한 것을.
동료 대원들이 루베트를 말리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적극적이지가 않네요.
이것들은 공작의 인물됨을 파악하지 못한 걸까요?
하긴, 결국은 루베트 대신 다른 한 명이 들어가야 할 운명입니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된듯하니 너그럽게 봐줘야겠지요.
어느덧 게이트 앞에선 루베트는 '그럼, 다녀오겠다.'라고 말하며 발을 내디뎠습니다.
그제야 상황을 깨달은 저는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녀는 아직도 제 손을 꽉 쥐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건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이세계 소환에 대해 명확히 밝혀진 것은 매우 적습니다.
그중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한 개의 게이트에 한 명의 사람.
이건 절대적인 명제였습니다.
한 개의 게이트에 두 명 이상의 사람이 빨려 들어간 사례는 발견된 적이 없거든요.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루베트에 이어 저도 게이트에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억울합니다. 일부러 늦장을 부리려고 성적을 조작했는데 말입니다.
동료들의 당황한 얼굴이 보입니다.
카나가 다급하게 외칩니다. 걱정해주는 걸까요.
아닙니다. 기념 선물 잊지 말고 챙겨 오라네요.
저게 목숨 걸고 일하러 가는 동료에게 할 말입니까?
이거 직접 당하니 기분 참 더럽네요.
톨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이렇게 저의 이세계 라이프는 예기치 않게 시작되었습니다.
* * *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 듭니다.
겪어본 적은 없지만 죽었다 살아난 기분?
아니, 이것은...
최고로 high 한 기분입니다.
말로 표현하기는 힘듭니다. 그냥 최고로 high 합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온몸에서 활력이 샘 솟칩니다.
지금이라면 드래곤과 맞짱 떠도 이길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이세계 버프』
저는 적당히 만끽한 다음 주위를 살폈습니다.
음험하게 생긴 노친네들이 여러 명 있네요.
왠지 예감이 좋지 않습니다.
그리고...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채 저를 경계하는듯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미녀가 있었습니다.
그녀를 보는 순간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합니다.
마치 제 머릿속이라도 뒤져본 듯 그대로의 이상형입니다.
루베트와 동급의 미녀지만 정 반대의 속성입니다.
귀족다운 당당함이 매력인 루베트와는 달리 그녀는 마냥 연약해 보여 보호본능을 자극합니다. 보기 드문 은빛 머리칼이 사춘기 소년의 정념을 불타오르게 만드네요.
그녀는 굳은 결심이라도 한 듯 얼굴을 고치고는 입을 열었습니다.
"환영합니다, 용사님. 제 이름은 클라리스. 왕국의 공주이자 당신을 소환한 장본인. 부디 저를 도와 위기가 닥친 왕국을 구해주세요."
저는 하마터면 고개를 끄덕일뻔했습니다.
안돼죠. 아무리 공주가 부탁해도 원큐에 들어주면 호구로 취급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거부한다."
저는 야멸차게 말했습니다.
그럼 공주는 더욱 애원하는 어조로 달라붙겠죠.
그때가 절호의 타이밍입니다.
그래야 될 텐데... 공주는 "칫." 하며 혀를 찼습니다.
그러고는 "준비한 마법을 사용하라!" 사납게 외쳤습니다.
원래 세계에서 소환사의 패턴을 다양하게 배웠지만 이 경우는 좀 당황스럽더군요.
어안이 벙벙해진 저는 노인네들의 포박 마법에 그대로 적중당해야 했습니다.
이런, 방심해버렸네요.
큰일 났습니다. 이 패턴은 소환자를 세뇌시키거나 금제를 걸어 꼭두각시로 만든다는 패턴임이 분명합니다.
클라리스 공주는 안심한 표정으로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감히 천민 주제에 공주의 요청을 거부해?"
저는 뚱한 표정을 지으며 생각했습니다.
삼세번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밀당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한 번만에 태도가 돌변하니 정말 정 떨어지네요.
제 표정이 맘에 안 든 모양인지, 공주는 예고도 없이 제 뺨을 후려갈겼습니다.
후우. 간지럽지도 않지만 최저로 low 한 기분이 됐습니다.
화가 나는군요.
하지만 참아야지 별 수 있겠습니까.
공주가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습니다.
링의 형태지만 그 쓰임새가 무척이나 수상합니다. 마치 개목걸이 같습니다만.
그런 걸 남자에게 채운다면 모양새가 살지 않습니다.
여자면 모를까.
...
클라리스 공주는 표독스러운 얼굴로 개목걸이를 제 면상에 들이밀었습니다.
"이게 뭔 줄 알아? 이건 『종속의 목걸이』라고 해. 이걸 너에게 채우는 순간 너는 내 명령이 절대복종하게 되지."
그러고는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습니다.
큰일 났군요. 최악의 시나리오입니다.
역시나 그 패턴이었습니다. 저를 종속시켜 마음대로 부려먹으려 하는군요.
제발 공주가 "밤일하는데만 사용해줬으면." 하고 빌어봅니다.
......
이크. 본심이 튀어나와버렸습니다.
그렇다고 주워 담기에는 이미 늦었습니다.
어설프게 수습하려 들면 더 꼴불견을 보이고 말 겁니다.
이럴 때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게 최선이죠.
공주는 '뭐 이런 녀석이 다 있어?'라는 표정을 제대로 구사해냅니다.
조금 쑥스럽네요.
공주는 미덥지 않은 얼굴로 저에게 다가옵니다.
개목걸이를 채울 생각 인가 보네요.
위기의 순간이지만 저는 『이세계 버프』를 받은 몸입니다.
본래 가진 능력보다 열 배쯤은 강해진 저는 모든 마력을 일시에 개방했습니다.
포박 마법을 시전 중인 마법사들이 마나의 억류로 피를 토하며 쓰러집니다.
죽었을까요? 처음이라 힘 조절을 못했습니다. 뭐, 별로 상관없는 문제입니다만.
화들짝 놀라는 공주.
저는 그녀를 붙잡으며 개목걸이를 낚아챘습니다.
"뭐, 뭐하는 짓이냐. 무엄하다!"
얼굴은 딱 이상형인데 공주의 성격이 너무 까칠합니다.
마음에 안 드는군요. 뭔가 조치가 필요해 보입니다.
"개목걸... 이 아니라 이 링의 이름이『종속의 목걸이』라고 했지? 이걸 너에게 채운다면 아주 재밌을 것 같은데."
공주가 두렵단 듯 몸을 떨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저는 망설이지 않고 공주의 목에 개목걸이를 채웠습니다.
생각보다 잘 어울립니다.
제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공주는 목이 막힌 지 기침을 연이어 해댑니다.
바닥에 쓰러진 공주의 모습이 조금 안쓰럽습니다.
이내 공주는 핏발 선 눈으로 저를 째려보기 시작합니다.
일어섬과 동시에 욕이 날아올 것만 같은 기분에 저는 "앉아." 명령을 내렸습니다.
공주는 데꿀멍 하며 곧바로 앉습니다.
"일어서."
일어섭니다.
"앉아, 일어서, 앉아, 일어서, 앉아, 일어서, 핥아."
......
이상한 상상하지 마십시오. 제 손을 핥는 거니까.
그러자 공주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울상을 했습니다.
아아, 왠지 배덕감이 느껴지는군요.
이런 기분, 정말 견디기 힘듭니다.
공주는 이제 완벽히 저의 노예... 종속됐습니다.
제 명령이라면 뭐든지 듣는 몸이 돼버렸네요. 아주 좋습니다.
이대로 공주에게 귀환 방법을 물어 곧바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최단 귀환 기록을 세울 수 있겠군요.
하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런 좋은 기회를 놓...
... 그게 아니라 루베트를 찾아야 합니다.
그녀는 다른 곳에 떨어진 모양입니다.
저도 위험할 뻔했지만 그녀가 걱정됩니다.
찾으려면 시간이 꽤 걸리겠지요?
으흐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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